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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십구정려기(十九旌閭記)
十九旌閭記 夫忠孝烈三者爲臣爲子爲婦之爲其所當爲而爲其所當爲者幾希故爲其所當爲者間或有之 則下有春曹之啓達上有 彤墀之恩典此實國家勸善揚美之盛意也是以吾東之言表宅者以延李之八紅門玄郭之十二旌稱之是兒童走卒之萬口一談者也吾門之綽楔亦爲不少故次第聯錄以備後孫之閲覽焉副正公諱瑜號虔谷玉川府院君諱元吉之子也事父母能竭其力前後喪身自負土以完襄事繼母憂亦如之事君能致其身麗運既訖辭官歸鄉罔僕自靖 世宗朝命葬以一品禮又以御製詩褒之旌其閭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盖幷褒其忠也享順天之謙川祠公之子節愍公諱崇文號竹村竹村之子敎官公諱哲山號龜川父子當 端廟遜位之際與六臣同禍 肅廟朝有兩世貤旌之命享于 莊陵朝士壇及公州東鶴寺又配謙川祠諱義孝號獨處堂判書樂齋公六世孫也以節士公之閔腹年至十五追税廬墓隆寒極熱亦不少懈冬則日爲之陽夏則雲爲之陰人皆異之 純廟朝命旌通德郎公諱時聖號觀水亭副正公八世孫也事親至孝丁内外憂泣血居廬骨立三年涕淚濕於苫席春夏之間虫化生且事季父如事生我叔侄所居大江隔之問候之行日日渡來或値江漲則呼奴問安人皆稱歎觀水公之曾孫諱泰望號詠歸堂幼哭天崩事生養母極盡孝敬養志養口病致其憂喪致哀闋服朔望展墓以寓終身之慕先世無墓位者亦買田不替香火誰至衰耋遠近祀事躬自薦獻睦婣任恤人無不感服又有家禮剳疑一卷名公巨卿隱逸之士皆和堂韻 高宗朝幷施兩世旌閭之典諱有儉號東川副正公九世孫也事親至孝一無違志及遭巨創遵禮終制哀毀得疾以此不起其妻聞慶宋氏當皐復之時縊死園中家人救之得甦宋氏幡然自思曰老姑在堂亡夫無嗣其與溘然徒死不若忍痛苟活以存趙氏之嗣遂不死 景廟朝幷旌夫婦之孝烈 贈參判公諱應臣副正公十一世孫也號孤隱事母至孝甞曰吾家貧窶縱不能養口體所可勉者養志一事於子職爲當然婉愉承順未甞少咈慈旨及當巨創廬墓三年 高宗朝登聞命旌 諱碩溥副正公十二世孫也天性仁孝居喪哀毀盡禮居家修齊節儉鄉里稱賀 高宗朝贈左承旨命 旌進士公諱善浩副正公十五世孫也生有異質自幼年以善事親名養志養口務悦親心羽毛鱗諸物儲所居室躬自奉進而親自營辦未甞使人代勞公所居室雖晨夜炭爐常紅其親甞參長水試奉試券回鄉之日失路誤入八公山夜深路黑莫知所向適有鬼火導路之異人皆謂山靈之黙佑其親必登庠云其后果然與弟進士章浩友愛甚篤宗族鄉黨稱其孝悌焉 高宗朝贈敎官命旌監役公諱禹錫號江庵副正公十五世孫天性至孝夙患嬴弱入學不以時先公以爲憂一日奮曰貽憂父母如此尚能子乎遂自力請就學焉及親有疾十年侍湯拜醫合藥與凡親口所宜不擇遠近難易必致而後己遭喪年己至不毀而哀痛冤號聞者莫不感動家有畜狗爲之不食躑躅悲鳴不離喪側三日而後止鄉黨至今傳以爲異談與弟昌錫友愛甚篤同炊六十年不見物我之有分 高宗癸巳命旌而 贈佐郞諱奎漢副正公后贈參議諱仁鶴六世孫也禀性仁孝者幼時以孝聞於鄉里有二子曰采龍采麟孝根天禀行襲庭訓入則事親以孝出則接人以敬人皆稱之曰孝順還生孝順采龍妻李氏采麟子婦金氏又皆以孝烈聞 哲廟朝命旌諱龍模副正公十七世孫以孝名承其庭訓事重堂無一違志丙戌遘疾不起其妻李氏待殮殯后遂有下從之志以諺語裁書二幅一以遺媤家一以遺親堂以示永訣自縊而死高宗朝幷旌嗚呼樂齋公虔谷公伯仲之忠孝可與日月爭光而后孫繩其祖武特蒙恩典者至於十九之多則靈芝醴泉自有本源而天何偏厚於吾趙之一姓耶然學洙自有痛恨自存焉不肖之王考碁隱公夫婦以入 啓之孝當此滄桑變改倫綱頹圮尚未蒙允泣血泚筆尤不勝感涕云爾 後孫 學洙 謹記 십구정려기(十九旌閭記) 무릇 충·효·열(忠孝烈) 이 셋은 신하된 자, 자식된 자, 지어미된 자가, 마땅히 할바를 행한 것이나 이를 마땅히 실행한 자가 적은지라 이를 행한자가 간혹 있으면 아래로 예조(禮曹)의 계달(啓達)이 있고 위로는 국조(國朝)의 은전(恩典)이 있게 되는데 이는 실로 나라에서 착한 것을 권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날리는 장한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택리(宅里)를 표한것을 말하자는 연안이씨 八홍문(八紅門)과 현풍곽씨 十二정문(十二旌門)을 가지고 칭도하니 이는 아동들이나 달리는 군졸들까지도 한 가지로 말한 바이다. 우리 문종의 정문이 또한 적지않은 고로 차제로 기록하여 후손의 열람에 대비하고자 한다. 부정공 휘 유(瑜)의 호는 건곡이요, 옥천부원군 휘 원길(元吉)의 아들로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전후상사에 몸소 흙을 저다가 장례를 모시었으며, 계모의 상에도 또한 이와같이 하였고 임금을 섬길 때는 그 몸을 다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충성한 마음을 선왕께 바치니 세종대왕이 一품관의 예로서 장례하라 명하고 또 시를 어제(御製)하여 포양하시고 이문을 표하되 「효자 전부정 조유의 정려」라 하였으니 아울러 그 충성까지 포양함이었으며 순천 겸천사(謙川祠)에 배향하였다. 공의 아들 절민공 휘 숭문(崇文)의 호는 죽촌(竹村)이요, 죽촌의 아들 교관공 휘 철산(哲山)의 호는 귀천인데 부자가 단종이 왕의 자리를 물러날때 사육신과 더불어 참화를 함께 당하였으므로 숙종때에 양대를 동시에 정려 세울것을 명하고 莊陵 朝士壇및 동학사(東鶴寺) 숙모전에 배향하고 또 겸천사에 배향하였다. 휘 의효(義孝)의 호는 독처당이요, 판서 요재공의 六세손이며 절사공의 유복으로 十五세 때에 여막을 치고 다시 복상(服喪)하며 비바람이 불거나 춥거나 더웁거나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겨울에는 해가 더 쪼이고 여름에는 구름이 덮어 서늘하게 한고로 사람들이 다 경이롭게 여겼으며 순조때에 정포를 명하였다. 통덕랑공 휘 시성(時聖)의 호는 관수정(觀水亭)이요, 부정공의 八세손으로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지극히 효도하고 부모의 상사를 당하여 피눈물로 시묘하며 앙상한 뼈만 가지고 三년을 지냈다. 거적 자리에 눈물이 흘러 봄과 여름 사이에 벌레가 생겼으며 또 계부를 생부와 같이 섬겨 서로 사는 집이 큰 강이 가로 막혔으나 날마다 문안차 건너다니고 혹 강물이 넘치면 종을 불러 안후를 살피니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관수공의 증손 휘 태망(泰望)의 호는 영귀당(詠歸堂)인데 어려서 부친상을 당하고 생양모를 섬기며 지극히 효도하여 뜻과 몸을 봉양하였으며 병환에 근심을 가지고 초상에 슬픔을 다하며 탈상 후에도 초하룻날과 보름에 성묘하여 몸이 다하도록 생각할 것을 다짐하고 제위답이 없는 선영에는 땅을 사서 향화를 잇게 하며, 八十세란 노령에도 원근의 묘사에 몸소 참사하였다. 화목하여 외척을 친히하며 사람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 사람의 곤궁을 구제하니 향방이 감복하였다. 또 「가례차의(家禮劄疑)」 一권이 있으며 名公 巨卿隱逸이 다 당운을 화답하였고 고종때에 아울러 양대 정려의 은전을 베풀었다. 휘 유검(有儉)의 호는 동천(東川)이요, 부정공의 九세손으로 어버이를 섬기며 지극히 효도하여 한번도 뜻을 어긴 일이 없으며 상사를 당하매 예를 따라 상기를 마치다가 슬픔이 지나쳐 몸을 상하고 병을 얻어 이로써 일어나지 못하니 부인 문경송씨가 운명할 때에 후원에서 목을 매어 죽으려 하니 집안 사람이 급히 구하여 갱생케 하였다. 그 뒤 송씨가 뜻을 바꾸어 번뜩 생각하여 가로되 『늙은 시어머니가 집에 있고 죽은 지아비가 후사가 없으니 이렇게 죽는것 보다는 차라리 슬픔을 참고 살아서 조씨의 후사를 잇게 한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마침내 죽지 않으니 영조때에 아울러 부부의 효열을 정포하였다. 증 참판공 휘 응신(應臣)의 호는 고은이요, 부정공의 十一세손으로 어머니를 섬기며 지극히 효도하였다. 일찌기 집이 가난하여 능히 음식으로 봉양하지 못하니 감히 힘쓸 바는 뜻을 받드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하고 순하고 기쁜 안색으로 일찌기 조금도 어머님 뜻을 어기지 않았다. 상사를 당하여 三년을 여묘하니 고종때에 이를 듣고 정문을 명하였다. 휘 석부(碩溥)는 부정공의 十二세손으로 천성이 인효하여 상중에 슬픔이 지나쳐 몸이 상하도록 예를 다하고 집에 있을때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려 절검하니 향리가 감탄하고 고종때에 이르러 좌승지를 증직하고 정문을 내리었다. 진사공 휘 선호(善浩)는 부정공의 十五세손으로 나면서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더니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잘 섬긴다고 이름이 나 뜻을 받들어 모시고 육체도 받들어 모시니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조수어(鳥獸魚) 모든 물건을 거쳐한 방에 싸두고 몸소 봉진하였으며 일찌기 남에게 대신하도록 해 본적이 없었고 공의 거실에는 비록 새벽이라도 숯불 화로가 항상 붉었다. 그 어버이가 일찌기 장수시(長水試)에 참방(參榜)하여 시권을 받들고 돌아오다가 길을 잃고 잘못 팔공상(八公山)으로 들어갔는데 밤은 깊고 길은 어두어 갈바를 몰라하고 있는데 마침 도깨비불이 길을 인도해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산신령의 도움이라 말하였다. 그 어버이가 반드시 太學에 오르리라 하더니 그 후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아우 진사 장호(章浩)와 더불어 우애가 두터워 종족 향당이 효도하고 우애함을 칭송하니 고종때에 이르러 교관(敎官)을 증직하고 정문을 명하였다. 감역공 휘 우석(禹錫)의 호는 강암이요, 부정공의 十五세손으로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일찌기 몸이 파리하고 약하여 제때에 입학을 못하므로 선공이 근심하니 하루는 일부러 뽐내며 가로되 『부모에게 근심을 끼친것이 어찌 자식이리오.』하고 마침내 자기 힘으로 배우기를 청하였다. 어버이가 병환이 나매 十년을 시탕하며 의원을 맞아 약을 쓰고 무릇 어버이의 입에 맞는 것을 멀고 가깝고 어렵고 쉬운 것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구하여 들였다. 상사를 당하였을 때는 나이가 이미 높았으나 애통해 하니 들은 자마다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집에서 키우던 개가 먹지 않고 머뭇거리며 슬피 울며 상차를 떠나지 않다가 三일 뒤에 그치니 향당이 지금까지 이상한 일이라 전송하고 있다. 아우 창석(昌錫)과 우애가 두터워 六十년을 동거하며 네것 내것이 없이 지내니 고종계사년에 정포하고 좌랑(佐郎)을 증직하였다. 휘 규한(奎漢)은 부정공의 후손 증참의 휘 인학(仁鶴)의 六세손으로 품성이 인효하여 어려서부터 효도로써 향리에 아름다운 소문이 있었다. 두 아들 채룡(采龍)과 채린(采麟)의 효도는 하늘에 뿌리하고 품행이 가정의 훈계를 이어받아 집에 들면 어버이를 효도로써 섬기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을 공경으로 접대하니 사람들이 다 효순(孝順)이 환생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채룡의 처 이씨와 채린의 자부 김씨가 모든 효열로써 이름이 나 철종때에 이르러 효열로 정포하였다. 휘 용모(龍模)는 부정공의 十七세손으로 효행으로써 이름이 있었고 왕고를 섬김에 한번도 뜻을 어기지 않았다. 공이 병술년에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니 부인 이씨가 염습후에 마침내 따라 죽을 뜻을 가지고 언문 유서 두장을 써서 한장은 시가에 두고 한장은 친가에 보내 영결을 고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고종때에 이르러 함께 정포되었다. 아! 요재공, 건곡공, 백중의 충효는 해와 달로 빛을 다투고 후손이 선조의 자취를 이어 특별히 은전을 받은 자가 十九명에 이른즉 근원이 있는 것이지 하늘이 어찌 우리 조상에게만 편벽되게 두터웠을 것인가. 그러나 학수(學洙)가 스스로 원통스러운 일이 있으니 불초의 왕고 기은공(碁隱公) 부부는 그 효도를 품계하였는데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을 당하여 五륜과 三강이 무너져 아직 윤허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피눈물을 머금고 붓을 적시며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한다. 後孫 學洙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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